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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천 역사(7월 31일)
작성자 : 강영진(hstorykang@naver.com)  작성일 : 20.07.31   조회수 : 419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 집행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뿐이다.


3대 대통령 선거의 구호(1956.05.15.)

조봉암의 구호: '이것저것 다 보았다. 혁신밖에 살 길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 등을 지낸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맞서 2대 대통령 선거(1952)와 3대 대통령 선거(1956)에 출마했다. 특히 1956년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30%의 득표율을 올리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 자유당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4년 전인 1952년 2대 대선 때 무소속으로 출마해 얻었던 득표율(11%)의 3배 가까운 수치였다. 당시도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진행됐다고 여겨지는데, 이에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풍자가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집중견제를 받게 된 조봉암은 1956년 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북한의 남파간첩으로 알려진 ‘양명산(양이섭)’이라는 대북사업가로부터 창당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소위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조봉암 구명에 나섰지만, 결국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이었던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홍진기(전 중앙일보 회장) 등을 향해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후 52년이 지난 2011년 1월 20일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가 선고되어 복권되었다.

 조봉암은 지금의 갑룡초등학교의 전신인 강화공립보통학교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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