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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고 웃긴 반세기, 인영·동인천극장 이야기- 퍼옴
작성자 : 강영진(hstorykang@naver.com)  작성일 : 21.04.13   조회수 : 539
[외고 · 칼럼] 울리고 웃긴 반세기, 인영·동인천극장 이야기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⑭
인천영화극장(인영극장), 동인천극장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1942년 7월 2일 매일신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인천영극 개관. 인천부 상인천역 전에 건축 중이던 인천영화극장(정원 600명)은 이번에 준공되어 7월 9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었다. 뉴스문화영화 등 전문관으로 전국에서 제7번째의 신관이다.” 이 기사는 1942년 7월 2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다.

인천영화극장의 정식 개관은 1942년 7월 9일이다. 위치는 인천부 용강정 22번지로 지금의 동인천역 앞이다. 극장 위치로는 인천에서 가장 좋았다. 2층 벽돌 건물로 일본인이 설립했다. 김기봉 화백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과 인천의 부호 이흥선이 합작 출자한 극장이라고 했다.

뉴스문화영화 전문극장으로 조선에서 7번째 극장이었다. 뉴스문화영화란 다큐멘터리를 포함하여 교육영화, 계몽영화, 뉴스영화, 단편영화, 홍보영화를 포괄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일본제국주의 선전용으로 활용되었다.


▲편인철 인천시민


1935년 인천출생인 편인철 할아버지는 인영극장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동명학원 다닐 때 단체관람으로 인영극장에 가곤 했었습니다. 뉴스, 다큐멘터리를 주로 틀었는데 다른 극장이 25전, 30전 할 때 인영극장은 6전으로 무척 쌌다. ‘고도모 아이깡’이라고 어린이극장이었습니다."


인영극장은 초기에는 뉴스문화영화 전문극장으로 교육용 영화를 상영했기에 어린 학생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당시 애관이 극장의 대명사로 일본어로 ‘아이깡’이라 불렸다. 그래서 어린이극장이었던 인영극장을 ‘고도모 아이깡’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도모(こども)는 어린 아이라는 뜻이다.


▲1946년 9월 12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인영극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이 교육용 영화뿐만 아니라 성인을 위한 연극공연과 영화상영을 했다. 1946년 9월 12일 대중일보에 실린 광고는 1934년 조선금강영화사에서 제작한 ‘청춘의 십자로’이다. 안종화 감독에 이원용, 신일선이 주인공이었다. 다행히 필름이 남아 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이다. 한국영상자료원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101 여기를 클릭하면 무료로 볼 수 있다.


▲1950년 4월 18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최인규 감독의 '파시'가 상영되었다. ‘파시’는 1949년에 제작된 흑산도 올 로케이션 촬영으로 당시 최고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김종욱 평론가는 “피와 땀을 합한 노력의 대가로 탄생된 영화 ‘파시’는 수작이 아닐 수가 없었다”라고 했고 영화학자 이영일은 “석 달 동안이나 촬영한 ‘파시’는 지금까지의 우리 영화에 먼지처럼 얹혀왔던 정체감을 후련하게 닦아줄 만큼 싱싱한 생동감이 있는 영상을 관객들에게 펼쳤다”라고 평가했다. 아쉽게도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1952년 인영극장 (출처 ANU한국연구회)


어린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왔다. 해방된 후에도 여전히 교육용 영화를 상영하곤 했다. 인영극장은 해방 후 적산극장이 되었고 소유권을 두고 이흥선과 김태진이 10년 동안 법정 싸움을 했다. 김기봉 화백의 증언으로는 이흥선이 일본인과 합작하여 인영극장을 만들었으나 당시 계약서가 존재하지 않았고 긴 법정 다툼 끝에 법원은 김태진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했다.


▲1961년 신축한 인영극장 개관포스터. 제공 김보섭 사진작가)


▲1964년 인영극장 (출처 경기대관 1965) 사진 속 인물이 김태진 사장이다.



▲1960년대 사진이다. ‘인영극장’이라고 지붕에 쓰여 있다.
사진 중앙 위쪽에 흐릿하게 답동성당이 보인다.



▲1972년 인영극장 (출처 국가기록원)


극장 왼편에 새로운 건물이 생겼는데 이름이 ‘인영호텔’이다. 1970년대에 들어 TV로 인해 극장산업이 어려워지자 김태진은 1972년에 인영극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인영빌딩을 세웠다.


▲1974년. 학생들이 동인천역 광장을 청소하고 있다. 사진 중앙이 인영빌딩이다.



▲동인천극장 1987년 10월 1일 개관 (제공 김보섭 사진작가)


김보섭 작가는 아버지의 권유로 3층에 1987년 동인천극장을 개관하였다. 처음에 극장 이름은 '태양극장'이었다. 그러다가 곧 '동인천극장'으로 개명하였다.



▲1989년 ‘개 같은 내 인생’ 상영


필자도 동인천극장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100석 정도로 작은 극장이었는데 ‘개 같은 내 인생’,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많이 상영했었다.



▲1996년. 사진제공 김보섭 사진작가. 우측에서 세 번째가 김보섭)


1996년 폐관하는 날에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마지막 상영작으로 김보섭 작가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선택했다.

김보섭 작가는 “동인천극장은 위치는 좋았지만 주위의 인형극장, 애관극장의 견제로 상업성 있는 영화를 가져오기 힘들었다. 적자는 아니었지만 수익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결국 당시 서울신탁은행에 매각했다.”고 했다.


▲현재 모습. 사진 중앙이 인영극장, 동인천극장이 있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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