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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싹튼 최불암의 영화인생 -퍼옴
작성자 : 강영진(hstorykang@naver.com)  작성일 : 21.04.08   조회수 : 466
극장에서 싹튼 최불암의 영화인생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⑬
최불암과 동방극장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배우 최불암


국민배우인 최불암은 인천 출신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인천에 건설영화사를 설립한 최철이다. 최철은 인천에서, 인천을 배경으로, 인천 스텝과 배우로, 인천영화를 제작했다. 어린 최불암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1940년에 인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아버지께서 중국 상해에서 큰돈을 벌어 지금 인성초등학교 자리에 집 겸 사무실로 건설영화사를 차리셨다. 옛날 고관대작의 집이었던지 경치가 참 좋았고 집이 워낙 넓어서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안채, 바깥채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 주거와 함께 회사를 차리신 거다. 배우들이 와서 기숙할 정도로 넓었다.”


▲최불암의 집이 있던 곳. 현재 인성초등학교


▲데쉴러 저택


최불암의 집은 하와이 이민사업자 데쉴러의 사택이었다. 데쉴러는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경영자들의 대표로 조선에 왔다가 주한미국공사 앨런의 도움으로 하와이 이민모집회사인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여 큰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 집은 나중에 우로꼬라는 일본식 식당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최철이 인수하였다. 그 후 제일교회의 다비다모자원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다. 현재 인성초등학교 자리이다.


▲최불암 가족 (왼쪽부터 최철, 최불암, 이명숙)


최불암의 모친인 이명숙은 대한제국 궁내악사의 딸이었다. 최불암의 배우 인생에 부모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1946년 8월 2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건설영화사는 자체적으로 남녀배우 연구생을 모집했다. 일종의 기획사인데 최철은 단순한 영화제작을 떠나 전반적인 영화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1946년 8월 2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건설영화사 제1회 작품, ‘무영의 악마’ 로케. 시내 송학동 건설영화사에서는 제1회 작품으로 시 후원하에 ‘무영의 악마’를 지난 7월 중순서부터 촬영을 개시하여 방금 월미도를 비롯하여 시내 각처에서 로케를 진행 중인데 금월 초순까지 촬영을 완료하여 중순경에는 상영하게 되리라 한다...”


최철은 건설영화사를 설립하자마자 첫 번째 작품으로 '무영의 악마'를 제작하였다. 월미도를 비롯하여 인천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기사를 보면 다음 2회 작품으로 ‘복수’를 제작 준비 중이라고 나온다.


▲1947년 3월 5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그러나 건설영화사의 2회 작품은 ‘조국을 위하여’였다. 인천에서는 문화관(표관의 후신)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편의 작품은 원본도 더 이상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영화 ‘수우’ 광고. 1947년 12월 7일 제일신문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영화 ‘수우’의 한 장면


1948년에 최철은 3번째 작품인 ‘수우’를 제작했다. 흑백 35mm 영화로 김소영, 전택이, 이금룡, 신카나리아 등이 출연했다. 순수 극영화가 아니라 항구의 조직 두목과 그를 개과천선 시키려는 카바레 마담과의 이야기를 다룬 경찰 정책 영화였다. 흥행 성적은 실패였다.


▲정의배 전 영화 촬영감독


정의배 전 영화촬영 감독은 최철이 제작한 ‘수우’영화 촬영현장을 기억했다.

"최철이 제작한 ‘수우’ 촬영현장에 간 적이 있었다. 인성초등학교 운동장 자리가 최철의 집이었는데 상해에서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검은 안경을 쓰고 키는 작았는데 체격이 땅땅했다. ‘수우’는 경찰청 후원으로 제작한 반공영화였다. 반도영화주식회사 사람들이 스텝이었다. 감독은 안종화, 촬영은 홍일명이었다. ‘수우’의 세트촬영은 최철의 큰 저택에서 했다. 최철의 일본식 저택 내부를 개조해서 영화 세트촬영의 거의 모든 장면을 촬영했다.”


▲1948년 3월 17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최철 부고 기사이다. 최철은 ‘수우’ 개봉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최불암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아버님이 서울 상영 때문에 서울 남산 회현동 어느 호텔에 머무셨는데 거기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님을 운구하여 인천에서 장례식을 크게 치렀다. 그리고 영정사진을 들고 동방극장 시사회에 참석했는데 영정사진을 들고 맨 앞자리에 앉았던 기억이 난다.”



▲1952년 등대다방에서 열린 인형전시회


이명숙은 생계를 위해 동방극장 지하에 등대다방을 차렸다. 등대다방은 그 당시 인천 문인과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최불암은 어머니 덕분에 동방극장을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고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 등등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영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에 이명숙은 최불암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하여 명동에 은성이라는 주점을 차렸다. 은성도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와 변영로, 박인환, 김수영, 천상병, 박봉우 그리고 화가 손응성, 이종우, 김환기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았다.



▲사진출처 KBS 한국인의 밥상 182회 한 장면


최불암은 2014년 KBS ‘한국인의 밥상’을 촬영하기 위해 인천에 왔을 때 시간을 내서 동방극장을 찾았다. 그때는 동방극장이 허물어지고 상가가 들어섰을 때였다.


“동방극장에 가보고 싶다고 하니까 (한국인의 밥상) 제작진들이 극장의 형체도 없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가볼 필요도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꼭 보고 싶다고 해서 극장 앞에서 이 자리가 옛날의 동방극장이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예전 극장 앞 길이 꽤 넓은 길로 기억되었는데 가서 보니 참으로 좁게만 느껴졌다.”



▲최불암의 집이었던 곳과 옛 동방극장 위치


글· 사진 윤기형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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