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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 많이 상영했던 동방극장, 사라진 아쉬움! - 퍼옴
작성자 : 강영진(hstorykang@naver.com)  작성일 : 21.03.30   조회수 : 908
외화 많이 상영했던 동방극장, 사라진 아쉬움!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⑫
낙우관, 동보영화극장, 인천키네마, 동방극장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1937년 5월 5일 매일신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1937년 5월 5일 매일신보 기사다. 가부키좌가 화재로 인해 전소된 이후, 인천에 극장은 애관과 표관 밖에 없었다. 당시 인천의 인구가 10여만 명에 달했지만 오락기관이 부족했고 일본인 극장 낙우관 착공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는 기사 내용이다. 2층이었고 콘크리트로 지어진 극장이었다. 동방극장의 출발이 낙우관이다.


▲1938년 2월 2일 동아일보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37년 인천의 영화상설관 흥행 기록을 보면 애관 입장객이 14만5000명이었고 표관은 18만2640명이며 낙우관은 2470명이었다. 그밖에 가설극장 입장객이 9700명에 달했다는 기사이다.


▲1938년 12월 31일 동아일보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38년 12월 31일에 낙우관이 동보영화극장으로 변경되어 봉절관이 되었다. 봉절관은 개봉관이란 뜻이다. 이때 다다미에서 의자로 시설을 개조했다. 1937년에 일본의 동보(도호)영화사가 조선에 진출하면서 미리 자리 잡았던 송죽(쇼치쿠)영화사와 본격적인 경쟁을 벌였다.

동보는 경성에 동보영화사를 설립했는데 그게 스카라극장의 전신인 약초동보극장이었다. 인천에도 동보영화극장을 설치한 것이다. 이로써 애관과 표관, 동보영화관의 삼파전이 시작되었다.


▲출처 오광철, 이희환, 김식만


표관 바로 코앞에 있었다. 표관 입장에서는 동보영화관이 꽤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 출처 주희풍(hsifeng), 김식만, 국사편찬위원회


동보영화극장은 인천키네마로 변경된다(표관은 키네마극장으로 바뀌었다. 인천키네마와 키네마극장은 다른 극장이다). 이 사진을 처음 보고 깜짝 놀라 환호를 했다. 처음 발견된 인천키네마 사진이다. 화교이신 주희풍(hsifeng)씨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견했고 김식만 원장이 제공했다. 김식만 원장은 자신의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에 공개했다. 인천키네마는 정원이 370석으로 아담한 규모였다.


▲1943년 7월 16일 매일신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당시 전국 극장의 등급을 1급관에서 무려 11급관까지 나눴는데 1급관의 입장료는 80전이었고 11급관은 25전이었다. 인천키네마와 표관은 2급관으로 75전이었다.


▲동방영화극장 대표 홍사헌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인천키네마는 동방극장으로 바뀐다. 해방 후 전국의 일본인 극장들은 입찰에 의해 조선인에게 돌아갔고 그때 극장 이름이 모두 바뀌었다. 명치좌는 국제극장으로 약초극장은 수도극장으로, 대륙극장은 다시 단성사로 바뀌었다. 홍사헌은 한때 애관의 극장주였다. 인천 극장계와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동방극장은 3층 영사실과 1층 스크린과의 거리가 가까운 협소한 극장이었지만 좋은 외화를 많이 상영한 개봉관이었다.


▲1947년 6월 17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1947년 6월 17일 대중일보에는 동방극장의 광고가 실렸다. ‘당신의 눈동자에 경배를’이란 대사로 유명한 명작 ‘카사블랑카’가 동방극장에서 상영되었다.


▲1950년 1월 7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1950년 1월 7일 대중일보 광고. 인천에 있던 영화제작사 청구사진문화사(대표 김철세, 최성연)가 제작한 ‘심판자’가 상영되었다. 김성민이 연출했고 이향, 남해연 등이 출연했다. 



▲1950년 4월 7일 대중일보 (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청구사진문화사와 같이 인천에 있던 영화제작사 성보영화사(대표 원용일)에서 제작한 ‘사랑의 교실’이 동방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냈던 조우성 시인의 부친인 조수일 선생이 시나리오를 썼다. 



▲1955년 동방극장. (출처 인천여고 졸업앨범, 굿모닝인천)


1952년 작품 추억의 불야성(The Las Vegas Story)가 상영 중이다. 로버트 스티븐슨이 감독하고 빅터 마추어, 제인 러셀이 주연을 맡았다. 목걸이로 시작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였다.



▲출처 경기사진대관 1965


1965년에 촬영한 동방극장이다. 반대 방향에서 동방극장을 촬영했다. 007 시리즈 제2탄 숀 코네리 주연의 ‘007 위기일발’ 간판이 걸려있다. 숀 코네리는 007 시리즈 1탄 ‘살인번호(닥터노)’를 시작으로 ‘위기일발’, ‘골드핑거’, ‘선더볼 작전’, ‘두 번 산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등 7편에서 본드 역을 맡았다. 그는 90세의 나이로 20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눈꽃마을


동방극장은 1981년에 폐관되어 상가 건물이 지어졌고 스텐드바와 교회 등이 들어섰다. 그러다 그 상가마저 허물고 한동안 주차장으로 활용되다가 2018년에 지금의 눈꽃마을로 바뀌었다. 



▲김윤식 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를 지냈던 김윤식 시인은 동방극장이 허물어진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동방극장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걸 지켜내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인천시민으로 부끄럽다. 동방극장은 작지만 좋은 외화를 많이 상영한 극장이었다. 동방극장 건물을 살려서 그곳에 인천영화박물관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인천은 최불암의 부친인 최철과 조수일, 최성연 같은 영화제작자와 유신방, 황정순, 도금봉, 장동휘, 최불암, 황신혜 등등 많은 영화인들이 배출된 도시이다. 그들의 작품과 유품을 전시한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몇 번 건의했는데 기껏 엉뚱한 것을 만들어놓았다.”


▲옛 동방극장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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