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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쇼, 영화, 연극… 복합문화공간 역할 ‘톡톡’
작성자 : 강영진(hstorykang@naver.com)  작성일 : 21.02.18   조회수 : 521
애관(愛觀)의 도시, 인천의 극장사 
공회당, 시민관, 제일회관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초기 공회당은 시민회관 같은 곳으로 요리실과 당구장이 있었고, 큰 강당이 있었다.


공회당은 요즘으로 치면 시민회관 같은 곳이다. 경성을 비롯하여 지역마다 공회당이 있었다. 인천부립 공회당은 1922년에 설립되었다. 지하는 인천상공회의소로 활용되었고 1층에 요리실과 당구장이 있었으며 2층에는 무려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당이 있었다.


▲1924년 9월 4일 시대일보에 실린 인천국제청년데이 기사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1924년 인천의 국제청년데이 대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조봉암, 정수일, 김종범 등이 강연을 했다. 특히 조봉암은 인천 청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인천에 정치적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27년 3월 7일 매일신보에는 인천무용음악회가 열린 공회당 무대 기사를 실었다.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경성반도여자학원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4개 신문사가 모여 후원을 했던 특별음악무도연극대회가 열렸다. 반도여자학원은 3.1운동 이후 여성계몽교육운동론이 사회적 과제로 대두되면서 경성을 중심으로 생겨난 대표적 여성단체였다. 끊임없는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공회당 무대를 볼 수 있는 첫 사진이다.


▲1931년 11월 21일 개최된 인천용동권번 기생들의 ‘만주이재동포 위문의연기생연예대회’ 사진

1931년 11월 21일부터 이틀간 인천용동권번 기생들의 ‘만주이재동포 위문의연기생연예대회(滿洲罹災同胞慰問義捐妓生演藝大會)’가 펼쳐졌다. 무대와 관객석을 볼 수 있는데 관객석 맨 앞에 주저앉아 구경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재밌다.


▲인천부사에 실린 1934년 공회당

▲1948년 2월 15일 대중일보에는 조선에서 처음 열린 인형극의 만원사례를 홍보하고 있다.(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조선에서 처음 보는 인형극을 했다. 만원사례였고 특히 학생 아동의 관람을 대환영했다. 배우가 인형 탈을 쓰고 한 것인지 궁금하다.


▲1949년 10월 23일 예수교 대부흥회. (출처 인천제일교회)


공회당 내부 모습이 제대로 등장하는 첫 사진이다. 제일교회는 공회당 바로 인근에 있었고 나중에 시민관(공회당 후신)을 인수했다.

▲1949년 11월 12일 대중일보에는 황금일 여사가 칼빈 총탄을 복부를 받아내는 공연을 한다는 광고기사를 게재했다. (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황금일 여사가 칼빈 총탄을 복부로 받아내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다는 광고이다. 세상에 이런 공연을 했다니 믿기가 힘들다.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 중에 공회당이 소실되었다.


▲한국전쟁중 인천공회당이 소실되고 미군이 원조해 인천시립시민관이 신축됐다. 1955년 7월 (출처 김식만 ‘인천의 어제와 오늘’)

1955년 7월 기사다. 미군이 원조해서 3층으로 신축되어 1956년에 완공되었다. 이때 정식명칭은 인천시립시민관이었다. 줄여서 시민관이라 불렀다.

 

▲인천시민관 모습, 사진 왼쪽에 영화관이 보인다. 1950년대 후반 추정(출처 최성연, 화도진도서관)


사진 왼쪽에 영화간판이 보인다. 시민관은 당시 인천에서 최대 규모였고 영화상영뿐만 아니라 연극공연, 집회, 강연회, 권투경기 등이 펼쳐진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인천시민의 밤' 개최 (1958년, 출처 국가기록원)


1958년 인천시민의 밤이 개최되었다. 사진을 보면 시민관 규모가 상당히 크고 세련되며 모던한 공간이었다.


▲1958년 9월 23일 조선일보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지미 주연의 ‘산넘어 바다건너’를 상영했다. 이 당시 신문광고에 시민관이 많이 등장했다.

1963년 화평철교에 걸려있는 시민관 광고판이다. 지금 화평철교와는 다르게 매우 협소했다. 화평철교 건너편에 보이는 동네가 화평동이고 반대편 그러니까 촬영자 쪽으로 올라가면 홍예문을 지나 시민관이 나왔다.

▲1966년 인천시민관에서 인천시민 단합대회가 열렸다.(화도진도서관, 출처 최성연)


1966년 인천시민단합대회가 열렸다. 1층 뒤쪽 출입문이 3개이고 좌우에 통로를 만들어 출입문 3개씩을 더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민관은 1968년 제일교회에 매각되어 제일회관으로 변경됐다. (1969년 지도,출처 김식만 ‘인천의 어제와 오늘’)


시민관은 1968년에 제일교회에 매각되어 제일회관으로 변경되었고 영화상영을 이어갔다.



▲인천시민관은 1977년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사용됐다.(출처 인성여고 졸업앨범, 굿모닝 인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사용되었다. 인성여고는 농구부가 유명했다. 어느 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농구부가 연습 중이었고 코트 좌우에 관중석이 있었는데 위층에서도 경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기억된다.


▲현재 인성여고 다목적관이다.


▲옛 공회당 위치

글· 사진 윤기형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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